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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개혁: 끊어진 관계를 치유함(김명호목사님)

2013.09.1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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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12과 개혁 : 끊어진 관계를 치유함(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9/21/13





 


연구 범위
딤후 4:11, 몬 1~25, 고후 10:12~15, 롬 5:8~11, 마 18:15~17.

기억절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오순절 이후에도 신자들의 관계가 껄끄러울 때가 있었다. 신약 성경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그와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에 대처했던 방식을 전달한다. 그 원칙들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매우 유용하다. 성경의 원칙을 사용하여 갈등을 처리할 때에 우리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회복된 관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과거의 위대한 영적 부흥은 관계 회복을 증진시켰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끼리 더 가까워지도록 일하신다. 교회는 교인들이 하는 말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증명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부흥과 개혁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무익하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깨진 관계를 회복하여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준비하기 위한 성경의 교훈을 배운다.
➋ 느끼기 : 그리스도의 자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용서의 마음을 가진다.
➌ 행하기 :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셨던 마음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용서한다.

A. 
❷ 그리스도인들이 혈연보다 서로 더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❸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려면 어떤 마음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께 굴복하고 예수 안에서 한 식구 한 형제가 된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형재의 사랑으로 대하고 만나야 한다.
❹ 관계 회복에 어려움을 느끼는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 먼저 기도하고 예수께서 권고하신대로 개인적으로 만나고, 다음은 증인들과 함께 만나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가 중재하게 한다.

B. 
❷ 용서란 어떤 마음이라고 생각합니까?
※ 용서는 예수 안에서 얻은 용서를 형제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으로 자신이 예수님께 참으로 용서받은 증거를 실천하는 것이다. 
❸ 성령께서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 사람들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여 온전하게 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결론 : 용서받지 못할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용서받지 못할 자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사도 바울도 동일한 용서의 정신을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첫째날(일) 분열에서 우정으로
9월 15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서로 협력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행 15:36~39). 바울은 마가 요한과 같이 앞길을 두려워하는 자를 신뢰할 수 없었다. 마가 요한은 이전에 복음을 증언하다가 앞으로 닥칠 위험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러한 이탈은 바울로 하여금 한동안 마가를 나쁘게 생각하여 혹독하게 판단하게 하였다. 한편 바나바는 그가 경험이 없는 까닭이라고 그를 변호하였다. 그는 마가가 목회 사업을 포기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이는 그가 마가에게서 그리스도를 위한 유용한 일꾼이 될 자격이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었다”(사도행적, 17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이었지만, 그들 사이의 문제는 해소될 필요가 있었다. 은혜를 전하는 사도라면 자신을 실망시킨 젊은 전도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했다. 용서의 사도는 용서할 줄 알아야 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긍정적인 지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변화로 말미암아 바울의 마음도 큰 감동을 받았다.

1. 바울이 디모데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어 보라. 바울과 마가 요한의 관계는 어떻게 개선되었는가? 바울은 그 젊은 전도자를 얼마나 신뢰하였는가?(골 4:10~11, 딤후 4:11)
[골4:10,11]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답: 바울과 마가의 관계는 헤어지기 전보다 더 친밀하게 되었다. 바울은 마가가 자기 일에 유익하다고 고백하였다. 

성경은 바울과 마가 요한이 화해한 사실을 간략하지만 분명하게 다뤘다. 마가 요한은 바울이 믿는 동료가 되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을 자신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회에 강력하게 추천하였다. 그리고 순교 전에는 디모데로 하여금 그를 로마로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그가 바울의 사역에 유익하기 때문이었다. 용서받은 젊은 전도자로 말미암아 바울의 사역은 강화되었다.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장애가 사라지자 그들은 복음을 위해 협력할 수 있었다.

<부가설명>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 때에 마가는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전도 여행을 떠나 돌아갔다.(행13:13) 행15:37~39을 읽으면 2차 전도 여행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 하고 바울은 1차 때 끝까지 동행하지 않은 사실에 의하여 동행할 수 없다고 해서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헤어졌다. 이때 바울은 마가를 전혀 신임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고 마가는 바울의 태도에 아마도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고 바울에 대하여 결코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성경구절들을 볼 때에 바울이 마가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을 알 수 있고 마가는 또 바울의 부름에 즐겨 응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에 의하여 두 사람이 예수님의 정신과 사랑으로 화해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바나바가 바울보다 더 용납하는 마음이 넉넉했던 것 같다. 이 시대에 바나바 같은 정신이 필요하고 화해하고 협력해서 함께 일한 바울과 마가의 정신이 필요하다.

교훈 :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분열을 극복하며 화합을 이룰 때에 성령은 우리를 통해 더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다.


둘째날(월) 종에서 아들로
9월 16일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

로마에서 수감되어 있을 때 바울은 골로새에서 도망쳐 온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만났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과 친분이 있었다. 빌레몬서는 도망친 노예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바울이 개인적인 간청을 담아 친구에게 보낸 서신이다.
관계는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관계의 손상이 영적 성장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다. 만약 그가 오네시모에게 반감을 품는다면, 그의 신앙 증거는 퇴색될 것이었다.

1. 몬 1~25을 읽어 보라. 관계를 회복하려면 어떤 원칙들이 중요한가? 핵심은 원칙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몬1:1~25(8~17)]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5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답: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사회적 조직의 상하관계나, 혈연의 관계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 안에서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동일한 신분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 

우선 바울이 노예 제도를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의외이지만, 그의 전략은 훨씬 효과적이었다. 복음은 이상적으로 모든 계급의 차이를 허문다(갈 3:28).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자신의 아들로 그리고 주 안에서 사랑하는 빌레몬의 형제로 돌려보낸다(몬 16).
바울은 도주한 노예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었다. 그래서 매우 궁핍하고 극빈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의 형제요 동역자가 된 오네시모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었다.
그는 빌레몬의 돌봄 아래서 음식과 숙소와 직업을 보장받았을 것이다. 훼손된 관계의 회복은 그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가 되었다(골 4:9).

<부가설명> “오네시모”는 “유익한 자”라는 뜻이다. 그가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도망하였다. 당시 법으로는 도망한 종은 죽여도 괜찮았다고 한다.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로마에서 금고되어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빌레몬과는 주종관계였으니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관계가 되었다고 바울을 강조한다. 그래서 형제로 맞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사랑의 실현이라고 말하면서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관계의 회복을 권한 것이다. 이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디선가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만나든지 불편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훗날(110년 경의 교부) 익나티우스의 글에 에베소 감독이 오네시모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익나티우슨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형언할 수 없이 인자한 너희 감독 오네시모”라는 표현을 했다. 전에 무익하던 자가 정말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다. 오네시모의 진정한 거듭남과 바울의 중재와 빌레몬의 용납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교훈 : 복음의 이상을 위해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시의 신분 제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셋째날(화) 차이에서 보완으로
9월 17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7, 11~12).

1. 앞에서 보았듯이 고린도 교회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고전 3:5~11, 12:1~11, 고후 10:12~15을 읽어 보라. 바울이 부흥과 개혁을 위해 제시한 매우 중요한 원칙들은 무엇인가?
[고전3:5~11]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12:1~1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후10:12~15]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량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답: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기능이 다르지만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러므로 협력하고 화해하여 올바른 관계로 연합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겨서 주님의 일을 부흥케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성경절들에서 사도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원칙들을 정리한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지만 여러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께서 다양한 일꾼을 사용하신다는 점을 지적한다(고전 3:9).
하나님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각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고 공동체를 섬기는 데 협력하도록 하나님께 은사를 부여받았다(고전 12:11).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은사란 없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필요하다(고전 12:18~23).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자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령은 봉사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사를 베푸신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정신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런 비교를 통해 실망감이나 우월 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가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낙담에 빠질 것이다. 반면 나의 사역이 다른 이의 사역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다. 두 가지 태도 모두 우리의 효율성을 약화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화력 내에서 일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증언하면서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사역이 다른 신자의 노력을 보완하면 교회는 천국을 위해 빠른 성장을 이룰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람의 몸으로 비유한 것은 정말 절묘하고 적절한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성경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기 전에 어떤 단체나 종교도 이런 비유를 사용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필자로서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 된다.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밖에 보이는 지체뿐만 아니라 내장도 있다. 지체들은 똑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한 유기체의 목적에 가장 적합하게 기능을 수행하며 몸을 세우고 살려서 사람노릇을 하게 한다. 지체 사이에 다툼이 결코 없다. 서로 도우고 보호하며 협력한다. 교회가 바로 그런 조직인 것이다. 교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의 지체들이다. 지체가 건강하면 몸이 건강하다. 지체가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면 몸이 제 기능을 온전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제 위치에서 건강하게 제 기능을 수행하면서 몸이 건강하게 생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은사를 주셔서 각자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를 보완하여 교회를 세우고 천국을 확장하도록 계획하셨다.


넷째날(수) 마찰에서 용서로
9월 18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0~21).

1.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행동을 정당화하는가? 나의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에 달려 있는가? 나를 괴롭힌 자가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용서는 용서받아야할 사람을 용서할 사람이 수용하는 것이다. 그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수용이 잘못을 정당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것을 확증하는 기쁨이다. 

2. 다음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용서의 성경적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롬 5:8~11, 눅 23:31~34, 고후 5:20~21, 엡 4:26~30)
[롬5:8~1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눅23:31~34]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고후5:20,21]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4:26~30]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답: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사실 때문에 우리가 용서해야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용서를 빌기 전에 하나님께 용서받은 은혜와 기쁨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이 성경의 용서의 본질이다.

그리스도는 주도적으로 우리와 화해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에 이르게 한다(롬 2:4). 우리가 아직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한다. 화해를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의 회개와 자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사실 우리는 죄를 자백할 때까지 용서의 복을 누릴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자백해야 하나님에게 용서의 마음이 생긴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용서가 있었다. 단지 자백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게 한다(요일 1:9). 자백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도록 깨우침을 주는 성령의 능력에 굴복할 때에, 우리는 변화를 입는다.
용서란 우리의 영적 온전함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 과오를 행한 자들이 비록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하여도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그들보다 나에게 훨씬 많은 상처를 준다.
용서란 내가 정죄하는 누군가를 놓아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정죄에서 우리를 놓아 주셨기 때문이다. 용서는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분께 잘못한 우리와 화목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과 화목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고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용서는 하나의 선택이다. 우리는 상대의 행동과 태도와 관계없이 그를 용서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의 정신이다.

<부가설명> 사람은 잘못을 빌어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용서는 잘못한 사람의 태도에 달린 것이 아니고 용서할 사람의 태도에 달렸다.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산다.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 때 그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지 않으면 그는 평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고 사는 사람은 그가 용서를 빌든지 빌지 않든지 이미 용서하고 있기 때문에 평안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그와 같다. 하나님께서 괴로운 것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회개로 하나님의 용서를 취하지 않고 죄 안에 숨어 있는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사단의 궤계에 속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교훈 : 우리가 전혀 자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목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다섯째날(목) 원한에서 회복으로
9월 19일

1. 마 18:15~17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다른 신자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세 단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날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마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답: 오늘날도 지혜롭게 이 단계를 따르는 것은 합당하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문제를 확대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이 말씀의 요지인 것을 깨닫고 그대로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마태복음 18장의 권고를 주실 때에 예수님의 바람은 문제를 가급적 확대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분의 의도는 당사자들이 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고 말씀하셨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에 여러 사람이 관여하면 그만큼 파장도 커진다. 사람들이 양분되면 전선이 형성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과 이해심을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를 조용히 해결하려고 할 때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우리가 우리의 차이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로 그런 환경 속에서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효과가 없을 때도 있다. 그런 경우에 예수님은 다른 한두 명을 부르라고 권유하신다. 화해를 위한 이 둘째 단계는 반드시 첫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단계의 목적은 그들을 더 갈라놓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합시키기 위한 것이다. 초청을 받은 한두 사람은 피해자의 주장을 증명하거나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안에서 관계가 소원한 두 사람의 화해 과정에 참여하는 상담자와 기도 친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이 소용없을 때가 있다. 예수님은 그럴 경우 문제를 교회에 내놓으라고 지시하신다. 물론 안식일 오전 예배를 중단하고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라는 뜻은 아니다. 1차적, 2차적 노력으로 화해가 안 되었을 때에 문제를 다룰 만한 적절한 곳은 직원회이다. 이 단계의 목적 역시 화목이다. 한쪽을 비난하고 다른 쪽을 두둔해서는 안 된다.

<부가설명> 우리가 화해한다고 노력하는 과정에 그 사실이 확대 재생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정말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예수님의 이 권고의 본의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교과 저자는 그 점을 잘 지적해주었다.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결코 확대하지 않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고 정말 두 사람이 해결하지 못할 단계가 되어 조력자가 함께 있다면 그들은 경우와 허물을 따지는 일을 결코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는 사랑으로 화해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고 사랑의 원칙 위에서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교훈 : 개인 간에 문제가 있을 때, 먼저 당사자들끼리, 2차적으로 한두 사람이 참여하여,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서 해결하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20일

“일꾼들이 저희 영혼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실 때, 모든 이기심이 죽고 경쟁의식이 사라지며 으뜸이 되기 위하여 다투지 않고 일치단결의 정신을 앞세울 때, 또한 그들 스스로 성결케 하여 서로 사랑하는 정신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될 그때, 하나님의 허락은 추호도 틀림없이 성취되어 성령의 은혜의 소나기가 분명히 내리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75).

“우리가 여호와의 큰 날에 우리의 피난처시요 높은 망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서고자 한다면, 모든 시기심과 최고가 되고자 하는 모든 다툼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 편에 두어야 한다”(마지막 날 사건들, 19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골 3:12~17을 읽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제시하였던 그리스도인 자질들에 대해여 토의해 보십시오. 이런 자질들이 모든 갈등 해결의 기본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자질들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마 18:15~18에 주신 원칙들을 실천할 수 있게 합니까?
[골3:12~1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기본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자질들은 거듭날 때 성령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새 생명의 성질이다. 

➋ 골 3:12~17의 가르침들을 다시 보십시오. 이 가르침들이 교회의 절실한 필요인 부흥과 개혁에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이 자질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자들의 자질이 되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회가 운영될 것이기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볼 때,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부흥과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르침이나 교리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전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기별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우리의 관계 속에, 우리의 작은 시기심, 다툼, 이기심,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망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과 개혁을 경험하기 전에 옆 사람 또는 목회자가 아니라 바로 내가 변화를 일으킬 성령의 능력을 간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이런 질문이 질문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령의 능력 없이는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가 안 되면 부흥과 개혁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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